無所有

2012. 10. 25. 11:00Daily Lives

 

 

 

 

 

 

無所有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서는 그렇다.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 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나는 자난 해 여름까지 난초 두 분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茶來軒으로 옮겨 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 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이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스인가 하는 비료를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그 애들을 위해 실내 온도를 내리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초를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耘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이때서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 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 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작을 못했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아갈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서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맹방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방향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서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훌훌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강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다른 의미이다.

 

 

 

                                                                                 1971 法頂

 

 

 

 

 

亦是...  所有慾의 끝판왕은 無所有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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